The Art of Bowing - PREVIEW

악기와 도구, 연주자와 신체 ― 그 사유의 실험을 넘어


글 이상빈 (작곡가)

[1] 고정된 줄, 소리의 원천이 되다


이 글은 '활질의 미학The Art of Bowing'이라는 공연 제목이 가져다 준 다소 흥미로운 생각들 중 몇 갈래를 엮어 서술한 글이다. 줄과 활을 통해 소리를 만드는 악기의 연주 모습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수만 년 전 인류가 처음 지구에 출현한 이래 처음 만들어진 현악기가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가장 원시적인 현악기의 연주 형태는 발현악기 혹은 타현악기였을 것이다. '활bow'이라는 특수한 연주 도구가 고안된 것은 아마 줄을 고정된 곳에 매어 두고 뜯고 쳐 보면서 임의의 음고를 가지는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였을 것이다. 줄을 어디엔가 단단히 고정하여 적당한 장력과 탄성력을 확보한 후 이를 손이나 피크 등으로 뜯거나 혹은 작대기로 치는, 크게 보면 단 두 가지의 현 자극법이지만 그 과정 속 여러 가지 변수들을 적당한 범위 안에서 제어한다면 다양한 종류의 소리를 연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여러 가지 변수들에는 '현을 치거나 뜯는 지점'과 '강도', '현을 뜯을 손가락 상의 위치', 그리고  '현을 치는 막대의 재질'까지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듯, 이미 발현과 타현의 상황만으로도 연주자가 고려해야 할 변수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제 '활질'로 생각의 범주를 옮겨 보자. 활질로 인해 진동하는 현을 초고속 카메라로 자세히 관찰해 본다면 활의 말총에 달라붙은 현이 활의 이동 방향으로 끌려 가다가 한계점에 다다른 이후 말총에서 떨어져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이 연주되는 한 음가동안 짧은 주기로 계속 반복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일명 'stick-slip'이라 불리는 과정이다). 활질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활질은 마치 무수한 점이 모여 선을 이루듯, '잔향resonance 혹은 decay'이 대부분 생략된 현 뜯기plucking라는 음악적 사건이 여러 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이 때문에 활질이라는 연주법은 앞 문단에서 언급된 발현악기와 타현악기의 연주 과정 속 다양한 변수들을 대부분 승계하게 된다. 여기에다 부가적으로 '음가'라는 지속시간이 더해지고, 이는 활질이라는 연주법을 '매 순간 새로운 소리 개체의 촉발attack이 일어나는 매우 복잡한 물리현상의 연속'으로 만든다.

이제 표면적 층위인 물리적 차원에서 활질 과정 속 통제되어야 할 변수를 생각나는 대로 간단히 짚어 보자. 한 음가의 지속시간 동안 '음고pitch' 변화가 잦은 점(흔히 비브라토의 형태로 관찰되기 쉽다), 말총으로 현의 어느 지점을 자극excitation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원하는 음색과 음량을 내기 위해 활을 잡은 손에 어느 정도의 힘을 주고 얼마만큼의 말총을 현에 맞댈 것인지에 대한 문제 등은 활질이라는 다소 특수한 형태의 연주법에서 비롯되는 주요한 고민거리이다. 예를 들어, 활질 도중 '현과 말총이 맞닿는 부분'과 '활을 손으로 잡는 부분의 거리'는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팔의 힘을 조절하여 균일한 음색과 음량을 유지하는 것, 다시 말해 미는 활과 빼는 활에서 주어지는 팔 힘의 '무의식적' 차이를 '의식적'으로 연주에 알맞게 조절하는 일이 찰현악기 연주자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2] 해금, 활, 그리고 몸의 움직임


이처럼 일반적인 찰현악기에서의 활질에 대해 생각해봤을 때에도 연주 과정 중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제법 떠오르는데(심지어 연주자가 아닌 사람의 시선임에도 말이다), 본 공연에서 다루어지는 '해금'이라는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진 찰현악기는 또 다른 차원의 이슈를 활질 과정 속으로 몰고 오게 된다. 우선 해금의 두 줄 사이에 말총이 끼어 있는 형태로 위치하고 있는 구조 자체가 다른 찰현악기와는 상이한 지점이고, 해금 활은 육안으로 멀리서 보기에도 말총의 장력이 매우 낮아서 활에 장력이 거의 없는 상태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해금의 활질의 초기 환경설정은 오른손으로 현의 바깥에 위치한 활대를 잡아당겨 말총에 충분한 장력을 확보해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그 후 두 줄 사이에 끼인 말총이 해금의 두 줄 중 연주를 윈하는 줄에 맞닿도록 한 후 가로 방향으로 움직여나가는 과정이라 설명 가능할 것이다. 이 장력의 초기값을 확보한 이후에도 연주를 할 때마다 후술할 현의 장력과 더불어 말총의 장력 역시 실시간으로 조절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윗 문단에서 서술한 '활을 쥔 손에 부여될 힘의 양'과 관련된 모든 이슈들이 해금 연주에서는 '말총의 장력 확보'라는 조금은 결이 다른 워딩으로 전환된다.

앞서 해금 활의 말총의 특수한 물리적 위치를 언급했는데, 이 특이점 때문에 생기는 또 다른 특이점이 있다. 해금은 두 개의 줄을 가지고 있는데, 연주될 현이 바뀔 때마다 활등의 향방을 여타의 찰현악기에 비해 극단적으로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연주자는 말총을 안쪽 혹은 바깥쪽으로 붙여 줄에 힘을 가하게 되는데 이는 해금의 또 다른 거대한 아이덴티티로, 꽤 새로운 신체적 감각을 연주자로 하여금 요구한다. 지금까지 언급된 해금연주 과정에서 오른손이 담당하는 역할을 종합해 본다면 '말총의 장력 확보와 조절('활에 주는 힘의 양' 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활의 향방을 연주될 현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 '활에 닿을 말총의 양을 실시간으로 바꾸는 것'과 함께 '활이 현의 어느 지점을 매 순간 자극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정도가 된다.

그리고 활질이라는 범주에서 조금 나아가 본다면 해금에는 '지판fingerboard'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비브라토(농현이라고도 하며, 한국 전통음악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음악적 요소이다)를 포함한 음고의 미시, 거시적인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왼손바닥 자체의 악력과 손가락 힘의 독립적 운용을 다른 찰현악기에 비해 훨씬 복합적이고 기민하게 해야 한다. 해금의 특권이자 연주자들에게는 커다란 산이기도 한 역안법力按法과 경안법輕按法의 복합적 운용은 해당 악기의 큰 아이덴티티로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해금 연주에서의 왼손은 악기가 활질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바닥에 적당히 고정하는 역할마저 겸해야 하는 특수성을 덤으로 가지고 있다. 즉 왼손과 오른손에게 주어진 임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엮여 있으며, 연주자 신체의 '여러 근육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연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악기 연주'라는 행위를 연상했을 때, 악기에서 발생하는 소리와 음악이라는 요소를 제외한다면 가장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 단연 '몸의 움직임'일 것이다. 본 공연에서 집중하고 있는 지점 중 가장 원초적인 영역 역시 '연주행위 중 연주자 신체 일부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 손가락, 손목, 손바닥, 팔과 어깨는 물론이고, 등에 위치한 크고 작은 근육들까지 마치 해금의 활과 현처럼 구부러지고 당겨지며 특정한 색깔을 지니는 음색을 창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고군분투하여 만들어낸 일련의 작업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3] 유연함과 탄력이 가져온 무한한 음악적 상상


해금을 연주하는 사람의 모습을 상기해 보면, 여타 찰현악기의 활들에 비해 큰 빈틈을 보여줄 수 있는 말총과 함께 왼손에 의해 아찔할 정도로 구부러지는 두 가닥의 명주실 현이 단번에 떠오르게 된다. 이런 특이한 악기의 특성들은 연주의 난이도를 높이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개성있는 음향을 창출해내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왼손의 움직임에서 파생되는 '떨릴 듯 매 순간 미시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음고'와 이로부터 확장되어 정립된 한국식 비브라토 '농현'은 한국 전통음악의 견고하고 독립적인 담론의 영역이고, 대부분의 거시적 음고 이동 순간이 이산적이지 않고 마치 빠른 포르타멘토 혹은 글리산도를 하듯 연속적이라는 점도 해금을 다루는 음악인들이 주목하는 해금의 중요한 특성이며, 활의 특성 때문에 생기는 특성인 '비교적 느리고 완만한 음 개체의 생성 속도' 역시 악기의 음향적, 음악적 결과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 공연 종료 이후, 아마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을 요소는 개성있고 강렬한 해금식 음향일지도 모른다.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때로는 야성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듯 묘한 까끌거림이 공존하는 복잡미묘한 음향적 이벤트 뭉치들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의 청취자들의 반응을 기대해 본다.

앞서 언급한 해금의 물리적 비결정성flexibility으로 인한 다양한 측면의 유연함과 탄력은 음향 차원의 미시적인 영역 뿐만이 아니라 오늘 선보일 음악적 결과물들을 구현하는 거시적 방법론에도 큰 영향을 준 듯하다. 본 공연의 프로그램들은 '즉흥 연주improvisation'라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연주형태와 '그래픽 노테이션graphic notation'이라는 음악 기술 체계를 통해 연주자의 음악 속으로의 개입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연주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신체와 음악 연주행위와의 관계', '연주자와 악기의 관계', '다층적 의미를 창출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악기'와 같은 주제들을 적나라하게 해부함으로써 관객들을 상대로 신선한 2차적 담론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혹은, 이 탐구의 지점이 연주자 본인에게도 의미있는 하나의 결산으로서 기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4] 연주자의 활, 음악 너머로 화살을 당기다


이번 공연에서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지점은 '해금에서의 활질이 어떤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관한 것이다. 본 공연을 기획한 해금 연주자 주정현은 한국에서 정제된 제도권의 한국 전통음악 환경과 그에 따른 교육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해금 연주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전통 예술의 계승과 수호의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겠으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위에 더 두터운 의미들이 쌓여 갔고 어떠한 아우라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아우라는 각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경험에 따라 다르게 접근될 것이다. 어떤 이는 전통음악의 예스러움을, 다른 이는 서양음악과는 차별되는 한국 전통음악의 고유성을 떠올릴 수도 있고, 또는 음악 외적인 사건들이 전통음악에 부여한 다른 이미지를 연상하기도 할 것이며, 아예 아무런 연상작용 없는 순수한 관점으로 감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 공연의 콘셉트에 관해 전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이미지는 활질로 인해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연주자의 신체와 격렬한 음향(해금이라는 악기가 이것을 극대화한다고도 생각한다)이었으며, 이어진 이미지는 국악의(혹은 국악'계'의) 보수성에 눌려있던 일종의 '음악적 야성'을 한껏 분출하는 연주자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본 공연에서 마주할 수 있을 법한 활질, 또는 국악기라는 대상에 대한 여러 의미와 아우라는 기존의 여러 국악인이나 국악기 기반의 공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과는 매우 다르다. 게다가 참여하는 동료 연주자들은 모두 최근에 미국에서 같이 활동해 오던 사람들로, 기본적으로 비국악기 연주자인 데다가 지금껏 각자 고유성이 큰 작업과 퍼포먼스를 해 오던 개성 강한 인물들이라 주정현이 다루고자 하는 '활질'이라는 음악적 활동의 의미를 더 넓고 다층적으로 분화시키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특히 이들과 함께 '활질'의 의미를 악기의 차원을 넘어 제의적인 제스쳐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낼지, 과연 이번 공연의 화두인 '활질'의 종착지는 어디가 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 채 오늘의 음악들을 마주하기를 제안해 본다.

[5] 경계에서 확장을 꾀하다


마지막으로, 연주자 주정현이 오늘 선보이는 몇 개의 작품들을 통해 작곡가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한다. 많은 연주자들이 본인이 연주할 곡들을 작곡하는 일은 대중음악이나 장르음악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제도권 내의 음악 속에서는 비교적 견고한 작곡가(만)의 역할 혹은 무의식적 권력 탓에 대부분의 커리어를 연주자로 보낸 인물이 작곡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연주자 주정현은 자신이 연주자로서 잘 이해해 왔던 악기의 물리적, 음향적 특성을 다양한 신체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자유자재로 운용하여 작품의 형태로 보여주는,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본인의 음악가로서의 경계를 확장해 내는 작업을 최근에 자주 시도하고 있다. 소위 많은 시간을 '종이'에 곡을 '쓰는' 데에 쏟는 서구권의 전통적 작곡가와는 다르게 악기와 살갗을 맞대고 지내는 시간이 많은 만큼, 그 이점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가 본 공연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주정현이 작곡가로서 마주할 많은 시간 동안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얼마나 기존의 예술과는 차별점이 있는 담론을 사회에 제공할지, 또 감상자에게 얼마나 새로운 경험을 선사줄 수 있을지에 대한 것 역시 작곡의 과정에서 매 순간 마주하게 될 고민거리가 되리라.

[6] Beyond intersections, over crossroads


오늘의 공연에서는 마치 출퇴근 시간의 교차로처럼 여러 가지의 키워드들이 교차하고 있다. 해금, 활과 활질, 동서양, 한국 전통음악, 농현, 즉흥음악, 진동의 물리학, 탄력과 유동성, 연주자와 신체, 음악행위의 의미와 그 확장, 작곡과 연주자 등···. 이 무수한 키워드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오늘 공연이 이토록 많은 화두들을 한 곳으로 모아서 어떤 새로운 생각을 할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그만큼 한 영역 안에 맞춰 넣을 수 없는, 쉽게 규정되지 않는 형태의 연주와 작업들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격렬히 경계선을 뚫고 넘나들어 진취적인 시선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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